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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와 쟁점

주거권 강화를 위한 지방분권을 기대하며

봉인식(경기연구원 도시주택연구실장)

   주거권은 인권의 하나로 모든 사람이 적정한 주거에 거주할 수 있는 권리다. 여기서 적정함이라 물리적인 환경뿐 아니라 경제적, 사회적 적정성을 의미한다. 당연히 국가는 국민의 주거권이 보장되도록 노력해야 할 의무가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공공임대주택이나 주거급여와 같은 정책들은 그래서 만들어졌고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변에는 여전히 주거문제를 겪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2017년 11월에 정부가 발표한 주거복지 로드맵은 103만 가구가 최저주거기준에도 못 미치는 주택에 거주하고 있으며 반지하와 옥탑과 같은 매우 열악한 곳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산다고 강조하고 있다. 여기에 소득대비 주거비 부담이 과도한 가구, 비자발적 주거이동 가구 등을 포함하면 그 수는 더욱 증가할 것이다. 주거권의 강화를 위한 국가의 역할이 더욱 강화되고 확대되어야 할 이유다.
   그러면, 국가의 어떤 기관이 이런 역할을 맡아야 하는가? 조금 더 범위를 좁혀 다시 질문하면,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 그리고 지방자치단체는 다시 광역과 기초로 구분한 현행 3단계 행정체계에서 주거권 확대와 강화를 위한 이들의 역할을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가? 지금까지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질 기회가 많지 않았다. 익숙하지 않고 어색할 수도 있다. 오랫동안 중앙정부 중심으로 주거정책이 추진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최소한 주거정책의 영역에서 국가와 중앙정부를 동일시하는데 큰 이견이 없을 것이다. 지난 시절, 주택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짧은 기간에 대량의 주택을 싸게 공급하기 위해, 국가는 강력한 추진력과 실행력이 필요했다. 기능주의에 기초한 아파트단지 위주의 주택개발 정책과 제도는 그렇게 만들어졌고, 중앙정부 산하기관인 토지공사와 주택공사는 정책 실현의 첨병이 되었다. 10명이 각자 형편에 맞게 10개의 집을 나눠 짓는 것보다 한 명이 한 번에 100개의 같은 집을 건설하는 방식이 더 합리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89년 이후 본격화된 공공임대주택 정책 역시 이런 구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단기간에 주택난을 해소한 이런 방식이 효과를 보며 자연스럽게 중앙정부와 그 산하기관은 국가 정책의 프로타고니스트(protagonist)로 자리매김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런 모습은 큰 변화 없이 이어지고 있다.
   이 같은 중앙정부 중심의 정책체계 속에서 지자체는 자신들 지역의 주거문제에 대해 무관심할 수밖에 없었다. 지방자치제가 도입된 지 30년이 지난 지금도 주거정책의 테두리 안에서 지자체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현행 법률만으로 놓고 본다면 공공임대주택을 포함한 주거정책은 대부분 국가 사무로밖에 볼 수 없다. 예컨대, 공공주택특별법은 공공임대주택 공급지구의 지정, 지구계획, 건설 등에 대해 중앙정부와 산하 공기업이 주도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30만 제곱미터 미만의 소규모 지구에 대해서만 광역지자체에게 그 권한을 위임하고 있을 뿐이다. 이 법은 지자체와 협의 과정도 매우 소극적이며 형식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지역 주민들의 주거권에 관해 관심을 두기 어려운 제도적 맥락 속에서도 일부 지자체는 자체적인 사업들을 추진했으나 큰 부담감을 느끼며 정책의 전면에 나서기는 쉽지 않았다. 지자체의 부족한 재정과 경험, LH와는 다른 사업절차와 조건 등이 걸림돌로 작용했다. 시간과 비용이 늘어나는 부담 속에서 지방공기업은 자본 증액이나 자금조달도 쉽지 않았다. 이런 불공평한 구조 속에서 일부는 중앙정부 정책에 대한 거부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지금은 강한 추진력을 바탕으로 단기간에 대량의 주택을 공급해야 하는 시기가 아니다. 그렇게 해야 할 이유는 거의 사라졌다. 양적 구심력에서 벗어난 자유는 지역적 다양성과 균형 그리고 사회적 적정성을 바탕으로 한 주거정책의 지방화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경제적 효과성에 대한 이론적 논란은 여전히 있지만, 여기에는 보충성의 원칙에 기초하며 주택이 내재한 지역성이나 불교환성에 의해 주거정책은 지역 중심으로 추진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당위성도 있다. 우리가 빈번히 벤치마킹하는 선진국 대부분도 주거정책, 특히 임대주택 정책은 지자체가 주도하는 체계를 구성하여 운영하고 있다. 한편으로, 지자체와 민간영역에서 나오는 새롭고 다양한 시도들과 중앙집권적 체계에서 나타난 획일화된 공급, 계층적 지역적 수급불균형, 지자체간 재정 전가의 문제, 국가 공기업의 재무적 불안정, 지역시장의 저항 등은 주거권 강화를 위해 현 체계의 혁신적 재구조화를 요구하는 또 다른 이유다.
   변화하는 환경과 새로운 요구에 대응하며 주거권을 강화하는 중요한 열쇠는 중앙정부와 지자체의 역할 재편이다. 이는 주민과 가장 가까운 지자체가 중심이 되는, 중앙정부와 지자체가 상호협력적이며 수평적인 정책 추진체계로 전환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국가는 중앙집권적 체계의 관성을 멈추고 지역의 주체들을 전면에 내세우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지역 단위에서 정책의 대리인을 육성하고 새로운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한 법제 개혁과 조직 재편에 대해 구체적이고 활발한 논의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