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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와 쟁점

주거정책 지방화와 주거권

서종균(서울주택도시공사 주거복지처장)

우리나라 주거정책은 중앙집중적 성격이 강하다. 중앙정부가 정책의 세부적인 사항까지 결정하는 경우가 많고, 중앙정부 산하의 공기업이 정책 실행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다. 지방정부의 역할은 정책 결정이나 실행에서 매우 제한적이다. 주거정책의 중앙집중적 성격은 역사적 산물이다. 그런 체제가 만들어진 시대적 상황이 있고, 이를 지속시키고자 하는 역학 관계도 있다.
이런 경험 속에서 사람들은 주거정책 지방화의 필요를 확인하기도 한다. 중앙정부 주도 정책의 한계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지역 상황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중앙정부 주도의 택지 개발이 진행되면서, 도심은 쇠퇴하는데 외곽에는 그린벨트를 풀어서 임대주택을 공급할 땅을 개발하는 일도 나타난다. 중앙정부가 세부적으로 정해둔 공공임대주택 입주자 선정 기준은 지역사회 침체를 초래하는 원인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지방정부가 위급한 상황에 대응하려고 해도 활용할 수 있는 주거지원 수단은 거의 없다. 중앙정부 주도의 주거정책을 유지하는 것이 옳은 선택은 아닐 수 있다.
주거정책 지방화는 권리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주거에 대한 권리가 만들어지고 실현되는 방법은 두 가지로 구분해서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사회 전반적으로 주거권 침해 상황을 완화하기 위한 방법을 만들고 적절한 자원을 투입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권리가 침해된 상황에 대해서 국가가 의무적으로 해야 할 일을 명확하게 정의하고, 권리 침해와 관련해서 국가가 최선의 노력을 다하지 않았다고 판단될 경우 개개인이 국가를 상대로 권리를 주장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런 주거권 실현 방법과 지방화를 연결시켜 생각해볼 수 있다.
그 동안은 주거지원의 양을 확대하여 문제를 겪는 사람을 줄이기 위한 노력을 해왔다. 중앙정부가 중심이 되어 공공임대주택을 많이 공급했고, 그것은 주거 문제 완화에 기여했다. 다른 주거정책도 중앙정부가 내용과 지원 규모를 결정했으며, 지방정부는 일부 정책에서 전달자 정도의 역할만 했다. 이런 일을 중앙정부가 주도하든 지방정부가 하든 결과는 같은 것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방정부가 얼마나 협력적인가에 따라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현장에서 발견되는 문제가 반영되지 정책의 반성과 쇄신이 어렵다, 그런데 중앙정부는 뒤돌아볼 여유는 없고 늘 새로운 정책을 만들기에 벅차다.
역할이 없으면 책임감을 갖기도 어렵다. 지방정부의 주거정책에 대한 방관적 태도는 중앙정부 중심의 주거정책이 장기간 지속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중앙정부 주도의 주거정책이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여겨지면 지방정부로부터 높은 수준의 협력은 기대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주거정책은 국가사무가 아니라 자치사무가 되어야 한다. 지방정부가 공공임대주택을 어디에 얼마나 지을 것인지에 대한 결정을 할 수 있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 토지를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도 계획할 수 있어야 한다. 지역의 시급한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서 주거지원을 위한 자원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어야 하고, 통합적 지역사회를 위해서 임대주택 입주자 선정에 대한 기준도 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주거급여와 관련한 조사도 지방정부가 현장을 확인하면서 복합적인 욕구에 통합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사업의 일환으로 실시할 수 있어야 하고, 현장에서 파악한 문제를 정책 과제로 만들 수도 있어야 한다. 지방정부가 구체적인 정책 수단과 자원 배분에 대한 결정권을 가질 때 주거 문제에 대응하는 실질적인 주체가 될 것이다.
지금까지 이런 지방화를 추진하지 않았던 것은 지방정부가 아니라 중앙정부의 선택이었다. 당면한 목표 물량 달성을 위해서 기존의 효과적인 체제를 바꾸는 것은 위험하게 여겨졌다. 지방정부와의 협력은 중앙공기업인 LH와의 협력에 비해 많은 노력이 필요하고 결과도 장담하기 어려운 것으로 여겨졌다. 이런 선택은 이해가 가는 면이 있기는 하지만, 중앙정부가 주거정책 지방화를 위한 선택을 거의 하지 않았던 것을 정당화하기는 어렵다.
이제는 특히 주거권과 관련한 국가의 의무를 보다 구체적으로 정의하고 시민이 직접 요구할 수 있도록 하는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이를 고려할 때 지방정부의 역할은 더 커져야 한다. 지방정부는 생활의 기본적인 생활에 대한 시민의 권리를 보장하는 주체이고, 시민이 그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 대상이다. 국가가 의무적으로 대응해야 주거권 침해 상황을 정의하고 이에 대응할 수 있는 정책 수단을 만드는 과정은 주로 중앙정부 차원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하지만 일상에서 권리가 침해되지 않도록 하는 활동과 침해된 권리와 관련한 요구에 대응해야 하는 것은 지방정부이다. 의무적으로 이행해야 할 주거권이 정의되면 지방정부는 주거권 침해 상황은 직접 상황을 확인하고 판단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 사정관을 두고 국가가 직접 대응해야 할 상황인지를 판단하고 적절한 개입 방법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
주거권을 고려하는 정책의 발전을 위해서 지방정부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할 것이다. 쪽방, 고시원, 불법개조 원룸에 대한 정책은 한편으로는 저렴한 거처 공급을 확대하면서 기준 이하의 거처가 확산되지 않도록 하고 적절한 규제를 병행해야 한다. 이런 정책은 중앙정부가 방향을 정하고 필요한 지원을 하면서 지방정부가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가능한 일이다. 거처가 없는 이들을 위해서 국가가 긴급하게 제공해야 할 주거대책, 탈시설과 자립생활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주거지원 등도 지방정부에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추진하는 것이 적절한 일이다. 이런 주거권 침해와 관련된 정책을 만들고 추진하면서 기본적으로 보장해야 할 주거권의 내용은 더 명확해질 것이다.
지방화 이후 중앙정부는 재정 지원과 정책 방향 제시하는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지방정부가 지역의 문제와 정책 목표를 고려하여 적절히 자원 배분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모니터링 해야 하는 역할도 있다. 이런 중앙정부의 역할 변화가 간단하지는 않겠지만, 중앙정부는 그것을 넘어서야 전국적 집행 조직이 아니라 종합적인 정책 결정 기관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