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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환(토지주택연구원 북한연구센터장)
1. 들어가며
어쩌면 우리는 '우리 의지와 무관하게' 이미 통일준비를 많이 해 오고 있다고도 생각된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에서 진행된 산업화와 민주화 경험 그리고 미래를 향한 도전과 시행착오는 그 자체가 통일을 위한 준비일 수 있다. 한국의 지역개발 경험도 그러하다. 우리는 가장 낙후한 지역(국가)이 어떻게 가장 발전된 지역(국가) 중 하나로 성장할 수 있는지 경험해 보았고,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부작용과 치유방법도 시행착오를 통해 학습해 왔다. 이러한 한국의 지역개발 경험은 향후 남북협력과 통일시대 북한지역 개발에 다양한 방식으로 변형,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지역개발의 경험에 비추어 통일준비의 방향을 모색함에 있어 우리는 과거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미래지향적’ 관점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관점이 잘못된 경험과 지식은 오히려 독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이 글에서는 먼저 통일준비와 북한개발에 대해 예상되는 ‘과거지향적’ 관점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다음으로 지역개발 측면에서 한국이 경험하거나 지역개발의 새로운 방향으로 모색해 온 키워드를 남북협력과 통일준비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인지 살펴본다. 여기서 선택한 지역개발의 키워드들은 ‘거점개발과 균형발전’, ‘선계획 후개발과 지속가능발전’, ‘협력적 계획과 사회적 자본’ 등이다. 또한, 이런 키워드들의 밑바탕에 깔린 ‘희망의 시대정신’도 그에 앞서 간략하게 짚어본다. 남북간 적대적 인지프레임을 바꾸기 위한 방편을 제시하는 것으로 글을 마친다.
2. 문제제기 : 과거지향적 관점 vs. 미래지향적 관점
한지역 개발에 한국의 과거 경험을 적용할 수 있지만, 그것은 ‘미래지향적’인 것이어야 한다. 이하에서는 얼핏 당연한 것으로 보이는 논리 속에 숨어 있는 과거지향적 관점들 또는 과거회귀로 왜곡될 소지가 있는 주장을 비판적으로 살펴본다. 여기에서 다루는 논리나 주장은 어떤 구체적 이론·정책적 논쟁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필자가 과거지향과 미래지향 관점을 대별하기 위해 편의상 구성한 것으로 자기성찰의 성격도 있음을 밝혀둔다. 통일준비 또는 북한 개발에 관한 논의의 많은 경우 그 밑바탕에 깔려 있는 논리 중 하나는 ‘북한은 실패했지만 한국은 성공했고, 따라서 한국의 경험을 북한에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소한 이 언명의 가정 부분은 상당부분 사실로 인정된다. 하지만 한국의 경험을 북한에 적용해야 한다는 결론 부분에는 여러 단서조건이 추가되어야 한다. 한국이 전쟁의 폐허와 극빈상태에서 산업화에 성공한 것은 많은 부분 세계적 차원에서 근대국가 형성기, 냉전‧산업경제 시대를 배경으로 한 것이었던 데 비해, 지금 통일을 바라보는 남북이 처해 있는 시대상황은 탈냉전과 탈근대, 지식경제 시대로 그 상황 맥락이 다르다. 현재 내부 체제의 성격에 불구하고 북한이 대외개방과 시장경제로 진입을 본격화 하는 순간 그러한 시대상황의 차이는 명확한 현실적 조건으로 드러날 것이다. 때문에 한국의 과거 경험을 그대로 북한에 적용하는 것은 적실하지 않다. 북한의 성장잠재력에 대해 지경학적 이점과 풍부한 지하자원을 특히 강조하는 경향도, 그것이 사실(fact)임에도 불구하고, 다분히 산업경제 시대의 발상이 갖는 한계를 가지고 있음을 의심하게 된다. 지역·경제발전에서 요소투입의 양이나 비용보다 인적·사회적(human & social) 자본을 더 중시하는 최근 경향이 향후 북한 개발에서도 예외가 될 이유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에 안주하는 경향으로 또 하나 지적할 것은 통일 또는 그에 준하는 상황에서 북한 지역에 대해 한국 정부가 배타적 권한을 즉시 또는 가까운 시기에 취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정 하에 북한 개발을 구상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공식 통일방안인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은 물론 그간 남북이 합의한 통일의 원칙에도 맞지 않을 뿐 아니라, 대내외 시대 조건에 준거해 보아도 다분히 자기중심적 발상에 가깝다. 중국과 미국 등 초강대국의 개입가능성은 차치하더라도, 남북이 통일국가를 형성해야 하는 지금은 과거 강한 중앙정부를 중심으로 근대국민국가를 형성하던 시기와 달리, 대내적으로는 지방자치가, 대외적으로는 지역공동체(EU, NAFTA 등)와 국제기구(UN, IMF 등)의 권한이 강화하는 시대이다. 이렇듯 '한국이 주도하여 한국의 과거 경험을 북한에 적용하고, 북한의 지경학적 이점과 풍부한 지하자원, 노동력을 이용하여 북한지역을 개발' 한다는 식 발상은, 시대에 적합한 단서조항으로 보완되지 않는 한, 원칙과 시대에 부합하지 않는 과거지향적인 것으로 실현되기 어려운 우리만의 생각으로 그칠 가능성이 크다.
3. 희망의 시대정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미래지향적 지역개발의 관점에서 통일준비와 북한 개발의 방향을 살펴보자. 먼저 한국 지역개발의 마인드에 관한 것이다. 과거 한국의 산업화 시기 지역개발의 모토는 “우리도 한번 (남들처럼) 잘 살아보자”는 것이었다. 이론적 키워드는 아니지만, 한국 지역개발의 밑바탕에 깔린 기본 마인드가 아니었나 싶다. 통일준비를 위해서도 먼저 희망의 마인드, 긍정적으로 생각하기가 필요하다. 그것은 과거의 것과 그 열정의 크기 측면에서는 비슷할 수 있겠지만, 내용은 새로운 미래에 적합한 것으로 전환해야 한다.
통일은 최소한 세 가지 차원의 풀기 어려운 과제를 내포하고 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체제 통합, 선진국 반열에 오르고 있는 남한과 낙후한 북한 경제의 통합, 그리고 사회‧문화적 통합이 그것이다. 더 나아가 국제정치적으로 보면, 남북분단은 미국과 중국에 의한 G2 세계질서의 접점에 위치해 있고, 지리적으로는 중국, 러시아, 일본 등이 위치한 동아시아의 중심에 있다. 이러한 위치에서 이 정도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희망과 긍정의 마인드가 필수이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것은 식민지와 전쟁의 폐허에서 갓 벗어나 산업입국을 꿈꾸던 시절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것이어야 할 것이다.
이제 선진국 문턱에 서있는 한국이 새로운 건국으로서 통일을 준비함에 있어 가져야 할 그리고 주변 이웃에 제시해야 할 희망의 비전은 무엇일까? 한 걸음 떨어져 있는 외국인 교수의 글에서 그 단초를 발견한다. “남북통일은 한반도라는 범주를 넘어 세계의 미래와 국제 지정학적으로도 엄청난 혁신이다. … 1215년 입헌정부를 만들어 낸 영국의 전설적인 마그나 카르타(대헌장)처럼 통일한국 또한 고도로 혁신된 새로운 체제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는 법은 없다. 예를 들어 기후변화‧노령화 사회‧민주주의 침해와 같은 광범위한 문제들에 대처할 수 있는 새로운 제도적 개혁을 이뤄내고, 그 성과를 전 세계에 소개하는 것이다.” 임나누엘 페스트라이쉬 경희대 국제대학원 교수가 한 칼럼(중앙일보, 2014.03.14)에 쓴 글이다. 이제 통일한국에서 지역개발의 모토는 ‘우리도 남들과 함께 (또는 남들을 위해) 잘살아보자’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여기서 ‘잘산다’는 것의 의미는 과거의 경제적 부(富)를 넘어 훨씬 더 풍부한 삶의 측면들을 담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이제 이런 ‘희망의 마인드’와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를 밑바탕에 깔고 지역개발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통일준비의 방향을 살펴보자.
4. 거점개발과 균형발전
과거 지역개발에 있어 ‘거점개발’과 ‘균형개발’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로 간주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거점개발’을 자원을 효율적으로 투입하기 위한 수단으로, ‘균형개발’은 수단과 함께 더 상위의 목표까지 아우르는 개념으로 파악하여 ‘균형발전’으로 바꿔 쓰고자 한다. 이는 최근 지역특화발전을 통해 거점개발과 균형발전을 동시에 추구하는 흐름과도 맥을 같이 한다.
저개발국이 부족한 자원과 재원으로 경제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선택과 집중을 통한 거점개발 방식을 취해야 한다. 중국 등에서 볼 수 있는 경제특구 식 개발 접근이 그것이다. 북한도 개성과 금강산, 나선과 신의주의 네 접경지역에 특구 개발을 시도하고 있고, 최근에는 20개 가까운 지역별 경제개발구 계획을 발표하였다. 남북협력 또는 통일과정에서 북한 개발은 초기에 이러한 거점개발 방식을 취하게 될 것이다. 북중, 북러 접경의 신의주‧나선 지역과 남북접경의 개성과 금강산은 그 1차 대상이 될 것이며, 관계 개선시 육로 또는 항구를 통해 외부 자원(기술과 자본, 설비 등)의 접근이 용이한 남포와 원산이 그 다음 대상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거점개발이 수단이라면 균형발전은 이보다 상위의 목표와 관련된다. 균형발전의 목표를 간과하면 거점개발은 국토의 불균형과 더 심각하게는 사회적 분열의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성과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지만 한국도 일찍부터 정치적 또는 정책적 선택에 의해 거점개발과 함께 다양한 지역균형발전 정책을 추진해 왔다. 북한지역 개발에 있어서도 거점개발의 초기부터 국토의 균형발전을 위한 조치들을 병행해야 한다. 이는 한정된 자원의 양적 배분 차원이 아닌 기본 복지와 함께 지역의 특색 있는 발전을 도모하는 전략이 될 것이다. 한반도 차원에서 크게 보면 북한의 서부지역은 제조업 중심 산업지역으로, 동부지역은 에너지‧관광 지역으로 특화 발전이 가능할 것이다. 이는 대한민국 국토계획의 동서부축 개발개념과도 동질성이 있다. 초광역 개발축도 서부의 TKR-TCR 연계축과 동부의 TKR-TSR 연계축으로 상정할 수 있다. 이러한 큰 축의 구상에서 각 권역별 강점과 잠재력을 발굴하는 접근이 필요하다.
부언하여 거점개발과 균형발전의 병행을 위한 재원과 관련하여 북한은 과거 한국에 비해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도 볼 수 있다. 한국이 미국의 원조와 대일청구금 등을 초기 지역개발의 재원으로 활용했다면, 북한은 대외관계 개선시 이러한 국제적 지원과 함께 남한의 안정적 지원이 가능 할 것이기 때문이다. 남북간 경제격차(1인당 국민소득 기준)가 20 : 1이라 하면서 통일 당시 서독과 동독의 1인당 국민소득 격차가 2 : 1 수준이었음을 들어 동서독 통일에 비해 남북통일이 훨씬 더 어려운 과정일 것이라고도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당장 우리가 어쩔 수 없는 북한을 차치하고 보면 남쪽이라도 이 정도 경제성장을 이루었으니 그나마 통일준비를 많이 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남한의 경제수준이 북한의 2배인 것보다는 20배일 때 막대한 통일비용을 더 지출할 수 있는 여력이 있는 것 아니겠는가 생각해 본다.
5. 선계획 후개발과 지속가능발전
과거 한국의 지역개발에서도 ‘선계획 후개발’이 원칙이지 않은 적은 없지만, 그것이 실제 적용되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산업화 시기 국토‧지역의 개발은 경제개발의 후순위에 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반세기를 돌아보면 국토의 지속가능한 관리가 있어야 경제도 지속성장이 가능하다는 것이 명확하다. 북한지역의 개발에는 선계획 후개발과 지속가능발전 원칙을 초기부터 실질적으로 지켜나가야 할 것이다. 역설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사회주의 국가계획체계를 고수하고 있는 북한의 도시계획법과 국토관리 원칙은 이러한 원칙을 한국보다 더 철저하게 제시하고 있다. 오히려 문제는 향후 진행될 시장화와 개혁‧개방의 시기 지역개발 과정에서 시작될 것이다.
‘선계획 후개발’과 관련하여 통일이 새로운 건국과 같은 역사적 전환점이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국가의 기틀로서 토지(소유)제도와 통일수도에 대한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다음으로 국토비전과 공간골격 구상, 토지이용과 개발의 방향과 원칙, 지역‧지구 지정의 원칙과 대상지 조사 및 선정, 거점개발 대상지역과 지역별 특화발전 전략, 주요 도시별 개발과 보전지역 선정 등이 필요하다. 북한의 역사문화 유적과 자연자원의 보전과 이용계획도 중요하다. 국토‧지역개발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 될 수도 있지만, 지속가능한 에너지와 자원이용 체계도 사전에 충분한 조사와 계획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지난 세기 한국이 산업화 과정에서 이룬 성과를 북한지역 적용하면서도 부작용을 최소화 하는 접근이 가능할 것이다.
지속가능발전과 관련하여 역사‧문화‧자연 자원의 보고(寶庫)로서 DMZ와 백두대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DMZ는 남북을 가르는 장벽이면서 동시에 60년간 인간의 접근이 제한되어 보존된 생태지역으로서도 가치가 크다. DMZ는 “전쟁의 공포가 역설적으로 낳은 아름다운 자연”(홀 힐리 두루미재단 이사장)이며 동시에 냉전시대의 최후지역으로서 역사문화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남북통일로 이어질 백두대간은 그 자체로 한국이 가진 세계적 자연유산일 뿐 아니라 남북을 상하로 잇는 역사문화적 상징이고 한민족의 정신적 뿌리이다. 최소한 통일한반도를 남북과 동서로 잇는 백두대간과 DMZ 지역을 보존하는 방향에서 통일한반도 국토 구상과 개발이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평양을 포함한 북한 도시지역의 역사‧문화‧자연 자원을 보존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지역개발의 선결조건이 되어야 한다. 북한은 폐쇄적 사회주의 체제로서 역설적으로 세계적으로 독특한 근대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다. 도시 규모를 제한하고 도시와 농촌의 구분을 최소화 하는 사회주의 도시계획 원칙은 평양과 같은 대도시에서도 직주근접과 녹지가 도시내부로 침투해 있는 ‘독특한’ 공간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는 최근 우리 도시계획 기준에서 볼 때도 단순히 기존 토지이용을 무시하고 상업적 개발을 하는 것이 바람직 할 것인가 검토해야 하는 부분이다. 험준한 산악지형으로 인해 북한은 불가피하게 곡선형의 교통개발을 추진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에 대해서도 지속가능발전의 관점에서 재평가 할 필요가 있다. 일부 대륙‧광역 연계를 위한 고속화 도로와 고속철 구간을 제외한다면 일방적으로 산을 깍고 터널을 뚫는 식의 직선형 개발보다 자연경관을 최대한 살리는 ‘느린 곡선형’ 개발도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6. 협력적 계획과 사회적 자본
통일과 북한 개발에 있어 은연 중 북한 또는 북한주민을 대상화 하는 관점도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나온 정책은 정치적 실현가능성도 떨어질 뿐 아니라, 사회·경제발전의 원동력으로서 지역과 주민의 자발성을 극대화해야 한다는 점에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협력적 계획(collaborative planning)과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 개념은 북한지역 개발에도 중요한 함의를 주고 있다. 최근 도시계획과 지역개발의 화두는 ‘참여’와 ‘협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자산에 대한 개인적 소유가 허용되는 한국의 계획과 개발 과정에서 사적 이해관계를 조정하기 위해 발전해 온 계획 개념이지만, 향후 남북협력과 통일과정에서 북한지역 개발에도 적용해야 할 중요한 원칙이 될 것이다. 이미 상당부분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북한사회의 시장화는 향후 더 진전되고 남북협력과 통일과정에서 본격화 할 것이다. 북한지역 개발은 남한에서 정부와 개인들 간의 이해조정을 넘어서는 훨씬 더 복잡한 양상의 갈등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크다. 서로 다른 체제에서 살아온 사람들과 조직이 상호작용하고 협력해야 하며, 의사소통의 규범과 성향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이해관계 갈등을 겪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조율하는 제도를 새로 만들거나 기존 것을 크게 고쳐야만 적용 가능한 상황에서 지역개발을 진행해야 할 것이다.
참여와 협력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 전에 이와 관련된 남북의 인구 문제를 먼저 살펴보자. 통독 당시 동독 인구는 서독의 1/4이었고, 현재 북한 인구는 남한의 1/2이니 서독에 비해 남한의 복지지출 부담이 더 클 수밖에 없다고도 한다. 하지만 이것도 소극적 발상이다. 북한의 잠재력에 대해 지경학적 이점과 지하자원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무엇보다 ‘사람’이 가장 큰 잠재력이다. 후나바시 일본재건이니셔티브 이사장은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통일 후 북한 젊은이들이 온갖 어려움과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성공 기회를 찾아 나설 것이고, 이렇게 도전하는 에너지가 엄청난 동력으로 작용할 것”(조선일보, 2014.01.24)이라고 이야기 한다. 이렇게 보면 북한의 인구가 남한의 1/4이 아니라 1/2인 것이 더 좋은 것 아닌가. 물론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이 많은 것이 아니고 어떻게 사람이 서로의 마음을 얻고 협력할 것인가이다. 맹자가 일찍이 역설했듯, “天時는 不如地利하고 地利는 不如人和”하기 때문이다.
그간 협력적 계획과 사회적 자본 접근에서 주장되고 채택해 온 원칙들이 북한지역 개발에 있어서도 ‘다름이 분열의 단초가 아니라 창조의 원천’으로 전환되게 하는데 적용 가능할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역주민이 계획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은 매우 강력한 당조직과 군대조직을 갖추고 있다. 각 지역별로는 인민위원회와 그 산하 조직을 통해 주민들이 조직되어 있다. 남북협력 또는 통일 초기에 상당 부분은 다른 형태로 변형될 가능성이 있겠지만, 북한 각 지역의 주민들이 자기 지역개발의 주인으로 나설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OECD의 저개발국 지원 접근법의 원칙에서도 첫 번째로 제시하는 것이 ‘수원국(지원받는 국가) 정부 또는 수원국 기관의 리더십’이다. 이는 남북관계의 특수성으로 인해 매우 어렵고 복잡한 과제가 될 것이지만 불가피하게 선택해야 하고 미래지향적 방향이기도 하다.
사회적 자본 접근의 중요한 발견은 경제성장의 동력이 경제적 요인보다 오히려 사회적 요인, 즉 사회적 규범과 네트워크, 신뢰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체제의 이질성과 경제적 격차가 극심한 남과 북이 어떻게 ‘남 따로 북 따로’가 아닌 한반도 전체의 나아가서 동북아시아 차원으로까지 넓혀질 수 있는 공동의 규범과 네트워크, 신뢰를 만들어 나갈 것인가 하는 것이 통일 과정과 완성에서 가장 결정적 문제가 될 것이다. 이것은 복지와 토지제도, 통일수도 등 중요한 정책‧제도적 문제에 대해 “통일대박이 남쪽에는 소박이고 북쪽에 진짜 대박이 되는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통일연구원 김석진 연구위원)는 자세에서 합의하고 결단하는 것이 필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네트워크와 신뢰가 역사성과 경로의존성을 가짐을 고려할 때, 통일 전부터 지역과 시민사회의 교류활성화가 필수적이라는 점도 중요하다.
7. 나오며 : 적대 프레임을 바꾸기 위한 방편
이상에서는 ‘과거의 경험과 지식이 미래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가정에서 통일준비의 방향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는데, 다른 한편 통일과정에서 ‘과거의 경험과 지식이 엄청난 짐이 될 것’이라는 것도 사실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과거의 경험과 지식은 그것이 미래지향적이고 긍정적인 것일 때라야만 도움이 된다. 어쩌면 한국이 성공적으로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어 오면서 얻은 가장 큰 경험과 지식은 “과거의 경험과 지식에 안주하지 말고, 새로운 경험과 지식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일 수도 있다. 동서독 통일과 남북한 통일의 결정적 차이는 한국은 전쟁을 겪었다는 것이다.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 경험은 그 어떤 것으로도 치유 될 수 없는, 공동체를 마음 깊은 곳까지 분열시키는 치명상이 되었고, 지금도 서로를 대하는 기본 프레임으로 ‘적대 프레임’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통일을 준비하면서 북한에 대한 현황조사와 실태파악이 매우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서독의 경우도 “동독에 대해 너무 몰랐다”는 점이 통일 후 가장 아쉬운 부분이었다고 하듯, 그에 비해 사전 교류도 형편없이 적은 우리는 불문가지일 것이다. 여기에 더해 어쩌면 더 어렵고 중요한 것이 ‘생각의 틀을 바꾸는 것’이다. ‘서로를 적으로 대하는 마음의 틀을 바꾸는 과제’를 서로 상대를 탓하는 식으로 미루기에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는 않은 것 같다.
남북간에 정치(군사)적 대립을 정치적으로 풀기 어려운 문제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경제적 돌파구를 주장한다. 더 나아가 “남북관계와 통일은 ‘민족’의 논리와 ‘시장’의 논리가 변증법적으로 결합되어 전개될 것”이라고도 한다(북한대학원대학교 최완규 총장). 정경분리(政經分離)가 역설적으로 고도의 정치적 수사이기는 하지만, 경로의존을 깨고 생각의 틀을 바꾸기 위한 하나의 방편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민족’의 논리 또는 보편적 ‘인권’의 논리로 상호교류와 인도적 지원을 강화하고, ‘시장’의 논리로 남과 북이 상호이익이 되는 작은 것에서부터 경제협력을 강화해 나가는 것이다. 그것도 가능하면 민간이 앞에 서도록 하고 공기업이 참여하고 정부가 지원하는 식으로 시작 하는 것이 어떨까 한다.